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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GOUT Interview] MBC SPORTS+ 허구연 해설위원 DUGOUTV

dugout*** (dugout***)
2020.09.1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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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야구인생

더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의 산증인. 프로야구 원년부터 마이크를 잡은 세월만 어느덧 39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야구선수 생활을 했던 것까지 포함하면 51년 동안 야구와 함께 했다. 그야말로 야구 자체가 인생인 삶이다. 그에게는 늘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허프라, 기승전돔, 아들부자 등등. 류헨진, 대쓰요 같은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는 그만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막상 그를 만나보니 준비된 질문 따위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 한국 야구의 역사 그 자체인 그의 인생을 정형화된 틀 속에 어찌 가둘 수 있으랴.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야구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아닐까. 그의 입담이 때로는 편파해설 논란을 일으킬지라도, 그의 야구 사랑과 열정을 담아내는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 있는 일이다. 한국 나이로 어느덧 70세에 이른 허구연 해설위원의 반세기 야구 인생을 조명해 본다.

사진 황미노 에디터 곽동희 장소 KSN 사무실

<더그아웃 매거진>과 창간호 이후 두 번째 만남입니다. (8월 6일 인터뷰)

안녕하세요. 허구연입니다. 제가 <더그아웃 매거진>을 본 지는 제법 오래됐습니다. 야구를 소재로 비즈니스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더구나 요즘 관련 업계가 매우 어려운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긴 시간 동안 이렇게 이어 지고 있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더그아웃 매거진>이 야구를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에 대해 야구인의 한사람으로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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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로 보니 훨씬 젊어 보입니다. 비결이 있는지요?

제가 좋아하는 야구를 하고 있어서 덜 늙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친구들을 만나면 다들 ‘너는 왜 늙지도 않고 흰 머리는 왜 안 나느냐’고 물어보곤 합니다. (웃음) 지금 제 머리가 가발이 아닙니다. 그리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중요하죠. 욕심부리거나 갈등이 생기면 아무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니까요. 저라고 해서 기분 나쁘거나 힘든 일이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한번 지나가면 머릿속에서 완전히 날려버리는 편입니다. 그런 부분을 늘 중요하게 생각해왔고 아마도 그것이 젊어 보이는 비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평소에 즐겨 하는 운동이 있나요?

등산을 좋아했는데 시간이 없어 못 하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골프도 좋아했는데 요새 허리가 아파서 못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한미일 야구를 모두 봐야 하고, 해설 외에도 야구계에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이 많고, 만나야 할 사람들도 있어서 야외 운동을 위해 시간 내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대신 틈날 때 마다 실내에서 할 수 있는 러닝머신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술을 자제하고 몸을 피로하지 않게끔 건강 관리를 하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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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프라 허구연

 

해설위원 외에 2009년부터 2017년 12월까지 9년 동안 KBO 야구발전위원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KBO 총재 고문으로 있습니다. 어떤 일을 했고, 지금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요?

2009년에 유영구 총재님으로부터 처음 제의를 받았고, 그 이후 구본능 총재님과 함께 열심히 일했습니다. 프로, 아마추어 야구 등 분야에 얽매이지 않고 야구발전위원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KBO리그 운영 등은 기존에 해왔던 분들이 하고 계시니까, 저는 지자체나 정부, 기업들과의 협력이 필요한 대외적인 것들, 가령 시설 인프라 문제나 야구 저변 확대 같은 부분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프로야구장 신축과 리모델링에 자문도 많이 했고, 동호인 야구장건립을 위해서도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당시 야구 동호인 팀이 전국에 약 1만6천 팀이 있었는데, 야구를 즐기기 위한 애로사항이 많았었습니다. 예를 들면, 한 겨울 영하 10도가 넘는 추위속 운동장에서 아이스하키 장갑을 끼고 야구 경기를 하시는 분들, 야구 한번 하기 위해 2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분들도 상당했다고 들었습니다. 모두 근거리에 제대로 건립된 야구장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들이었기에 이러한 현실과 고충을 제도권에 전달해서 최종적으로는 야구장 건립을 유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많은 분이 저에게 기승전돔이라고 해서 돔구장 건립에만 관심이 있는 줄 아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웃음) 야구장 건립을 위해 울산, 포항, 마산, 수원, 익산, 거제, 의령, 보은, 정선, 안동 등등 정말 많이 뛰어다녔습니다. 한창 많이 다녔을 때는 3년 동안 차를 14만 5천km를 달려서 폐차시킨 적도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 결과 야구발전위원장 취임 시절 전국에 야구장이 약 160여 개 정도였는데, 현재는 약 450여 개가 됐습니다. 프로야구시설과 관련해서는 유영구 총재님께 말씀드린 것이 있습니다. 야구가 아저씨들의 전유물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성 팬들도 야구장에 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제가 먼저 제안을 한 것이 프로야구장에 여자 화장실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야구장은 남성 중심이라서 여성 팬들이 화장실을 한번 가려고 하면 줄을 엄청나게 오래 서야 했습니다. 여자 화장실을 많이 늘려서 여성 팬들이 야구장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고, 이런 노력이 지금은 꽤 결실을 거둔 것 같습니다. 저변 확대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독립 야구, 티볼, 여자야구, 대학동아리 야구 등은 제도권이 아니라서 그 누구도 신경을 쓰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지자체에 찾아가서 지원이 나올 수 있도록 이야기를 하고, 시설 사용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왔습니다. 이런 부분들은 지금도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야구발전위원장으로서 성과를 많이 남겼는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아무래도 프로 야구 9, 10 구단 창단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국내 야구는 실업 야구가 없어서 젊은 야구선수들의 취업문이 너무 좁습니다. 그리고 우리 프로야구는 지자체들이 운영권과 광고권을 구단에 주지 않다 보니 구단이 매년 적자가 나는 구조입니다. 이 같은 추세는 아무리 건의를 해도 변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유영구 총재님께 운영권, 광고권, 구장신축 등을 보장하는 새로운 모델의 구단을 만들자, 그래야만 기존의 지자체들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이런 시도가 정상적인 프로세스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간의 경험을 통해 말이 새어나가는 순간 신규 구단 창단이 무산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유영구 총재님과 아무도 모르게 밀어붙였던 것 같습니다. 9, 10 구단을 창단하는데 저만 역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창단 관련 소식이 알려지자 각 구단의 엄청난 반대가 있었고 저도 욕을 많이 들었습니다. 아홉 번째 구단이 나오다 보니 일정상 한 팀이 쉬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다가 10 구단 창단 이야기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엄청난 노력 끝에 구본능 총재님 때에 이르러 10 구단이 나왔죠. 되돌아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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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N은 어떤 회사인지요?

2002년 국내·외 야구 DB 구축을 목적으로 만든 회사입니다. 현대 야구는 갈수록 복잡해져 해설자 개인이 자료를 다 챙기는 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제 해설을 지원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저의 일정을 관리하고 해설에 필요한 자료를 저장·분석·생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장학사업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제가 은퇴 이후 장학사업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마추어 야구에서 고교나 대학 야구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많았잖아요. 그래서 은퇴하고 할 것이 아니라 당장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허구연장학회 상>을 만들어서 매년 시상을 한 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캄보디아와 베트남에도 야구장을 짓는 등 신경을 쓰는 이유가 저는 야구를 통해 받은 것이 있으면 베풀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우리 야구가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과 같은 국제대회에서 금메달도 따지만, 우리가 세계의 야구 발전을 위해 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다른 나라 처지에서 보면 얌체 국가 같은 거죠. 야구 인프라가 열악한 곳에 원조도 해야 하잖아요. 그런 이유에서 저 자신이 먼저 장학사업을 실행해야 후배들에게도 말을 할 수 있겠다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이 강민호 선수인데요. 강민호 선수가 FA 계약을 했던 시즌에 제가 애리조나 캠프에서 강 선수를 만나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돈을 어디에 쓸 것이냐. 기부해라. 강민호 선수가 흔쾌히 좋다고 했어요. 그래서 지금 경남 물금에 [강민호 야구장]이 들어섰습니다. 강민호 선수가 2억 원을 내서 정말 근사한 야구장이 지어진 겁니다. 이런 사례들이 앞으로도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해설가 허구연

 

KBO리그 원년부터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수많은 경기를 해설했는데, 해설가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죠. 사실은 그 당시에 동메달만 따면 성공이라고 봤거든요. 그런데 금메달을 땄잖아요. 더군다나 일본을 통쾌하게 이겼기 때문에 더욱 기억에 남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호시노 감독이 여러 가지 한국 야구를 향해 독설도 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호시노 감독을 잘 아는데, 당시 호시노 감독이 충격을 엄청나게 받았을 겁니다.

 

일본식 야구 용어들을 국문 용어로 최초로 정립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과 어떤 변천 과정을 겪었는지 궁금합니다.

일본식 야구 용어들을 바꾸기 위해서 MBC에서 PD, 아나운서들과 함께 회의했습니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워크숍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언어를 지배당하는 민족이 어떻게 독립국이냐. 저는 국어학자가 아니라서 다른 분야는 모르겠지만, 야구만큼은 일본식 용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야구는 미국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외래어를 쓰려면 미국식으로 쓰는 것이 맞고, 그렇지 않으면 국문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일관된 주장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데드볼, 포볼, 코로 등등. 이들은 일본 특유의 용어잖아요. 국어로는 몸에 맞는 볼, 볼넷, 땅볼 하면 되거든요. 저는 야구 용어만큼은 누구나 쉽게 이해될 수 있도록 국어로 고치고 싶었습니다. 참 고마운 것이 김용 아나운서와 MBC PD들도 모두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자신 있냐고 묻기에 저는 자신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상당히 논란이 되기도 했고 혼란도 있고 반대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죠. 되돌아보면 보람 있는 일입니다.

 

과거보다 야구 용어가 좀 더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평소에 해설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WPA(승리확률기여도), WAR(대체 선수대비 승리기여도) 같은 신조어들을 다 알고 있어야 해서 공부를 따로 합니다. 새로 나오는 정보가 있으면 계속 찾아봅니다. 야구 자료를 챙겨보고 분석하려고 따로 직원도 두고 있습니다. 시즌 중엔 중계 준비를 위해 항상 노트북 2개, TV, 스마트폰 등 이용해서 KBO 리그 5개 전 경기, 메이저리그 다수의 경기 중계를 지속적으로 보면서 분석하고 특이사항 등을 적어둡니다. 메이저리그도 미국 현지 야구 관계자들과 얘기도 하고 관련 기사도 읽고 자료도 찾아보고, 일본 야구도 챙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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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해설가가 좋은 해설가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요즘은 트렌드가 워낙 다양해서 하나로 정의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해설가의 역할에 대한 정립이 제대로 되어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많은 스포츠 중계가 남미나 미국에서도 혼자 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런데 해설이 있는 이유는 규칙과 관련된 상황이 발생하거나, 기술적인 문제가 나왔을 때 그런 부분을 선수 생활을 통해서나 현장의 감독 코치로서 경험이 없으면, 설명을 못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해설가는 정말 짧은 순간에 경기 상황을 바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은 책으로 공부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몸에 배어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좋은 해설가는 경험도 많아야 하지만 또 그 경험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시청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겠지요. 새로운 트렌드에 대한 빠른 이해도 중요합니다. 이런 것을 모두 갖춘 해설가가 좋은 해설가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구독 허구연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습니다. 유튜브는 기존 방송 스타일과 매우 다를 텐데, 유튜브 채널을 운영해 본 소감이 궁금합니다.

기존에는 공중파나 케이블에서만 방송했기 때문에 실은 뒷이야기나 재미있는 이야기들, 뭔가 가볍게 할 수 있는 것, 부드러운 것들을 상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또 제가 나이가 많아서 젊은 층과 소통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튜브를 하면 그런 제약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는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두 명 내지 세 명이 같이 해설하는 기존 방송 시스템에서는 해설가들이 말을 분배해서 해야 하니까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한 것이 나름대로 의미도 있고 잘했다는 생각도 들고요. 많은 분이 유튜브를 상업적인 것으로 많이 생각하시는데, 저는 유튜브 수익이 생기면 [허구연의 야구사랑 공익신탁]에 전액 기부할 것입니다. 그 수익금은 야구 발전을 위해 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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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허구연

 

촉망받는 야구선수이기도 했습니다. 성장 과정에 대해 알려주세요.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한 이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실업팀에서 쭉 야구를 해왔습니다. 중학교 때 투수를 하다가 어깨가 많이 상해서 그 이후부터는 줄곧 2루수를 봤고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항상 우승팀에 있었습니다. 후보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그것이 굉장한 저의 약점이었어요. 후보를 한 번도 안 해봤기 때문에 후보의 마음을 몰라요. (웃음) 제가 청보 핀토스 감독 맡을 때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왜 저런 플레이를 못 할까?’라고만 생각을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야구 선수로서 계속해서 주전만 하고 후보 생활을 안 해본 것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많은 분이 저를 금수저로 알고 있는데, 제가 중·고생 시절 아버님이 사업을 7번 실패해서 엄청나게 어려운 적도 있었습니다. 인생에서 제일 큰 고통은 1976년 한일 올스타전에서 당한 부상입니다. 정강이 다리가 다 부러져서 4차에 걸친 수술을 했습니다. 허벅지가 한 25인치 정도 됐는데. (웃음) 수술 이후에는 절반밖에 안 되는 거예요. 지금 프로 야구같으면 재활 프로그램이 있겠지만, 그 당시는 실업 야구니까 재활 프로그램이 없잖아요. 안 되겠다 싶어서 그 때 야구를 그만뒀죠. 그리고 나서 대학원 가서 공부하고 교수가 되자고 생각을 했습니다. 병상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한 끝에 법대 대학원에 입학했고, 졸업 후 대학 강사로도 일했습니다. 그때쯤 국내에도 프로야구가 생겼고, 제게 해설을 해달라는 요청이 와서 많이 고민하다가 결국 해설가의 길을 걷게 되었죠. 또한 살아오면서 제가 가장 고마운 것은 경남중, 고등학교 학생으로 보낸 시간들입니다. 전국 야구 우승팀인데, 그 당시 경남 중·고는 야구특기자가 없었습니다. 부산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들어가는 학교였거든요. 반 대항 야구를 통해서나 야구 좋아하는 학생들로 구성된 인원들이 당시 전국대회에 나가 우승도 하고, 굉장히 잘했습니다. 제가 1학년 때 들어가서 보니 학생회장이나 임원들이 모두 다 야구선수들이었습니다. 많은 분이 저에게 공부 잘했다고 하시는데, 저는 공부를 잘한 편이 아니고요. 제 야구 선배 중에서요. 세브란스 의대를 나와서 뉴욕에서 유명한 박사, 의사도 있을 정도였어요. 다들 공부하면서 운동을 한 겁니다. 야구부 생활하면서 서울대에 시험 봐서 들어간 분들도 있고요. (웃음) 제가 그런 곳에서 지냈기 때문에 야구선수가 야구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지금까지도 박혀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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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보 핀토스 감독 시절 성적이 나오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극복했나요?

주사를 빨리 잘 맞은 거죠. (웃음) 그 당시에 MBC 청룡 감독을 하라는 요청도 있었는데, 저는 감독 생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정부에서 찾아와서 청보 감독을 하라고 해서 한 달 넘게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우여곡절 끝에 감독을 맡게 되었습니다. 주변에서 많은 이야기를 해줬는데 특히 큰형님의 조언이 기억에 남습니다. 큰형님이 말하기를 ‘너 보니까 여태 승승장구만 했는데 한 번 매운맛을 봐야 한다, (웃음) 젊었을 때 좋은 경험을 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조언을 하더군요. 그러다가 아시다시피 감독을 1년 만에 그만두게 됐지만, 정말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부족함도 많이 느꼈고요. 그리고 롯데 자이언츠 수습 코치 갔다가 미국 가서 마이너리그 코치를 했는데, 그때가 90년이거든요. 청보 감독 그만둔 것이 지난 후 돌아보면 인생의 전환점 내지는 인생을 정립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원래 계획은 LA 다저스로 가려고 했었는데, 당시 토론토 블루제이스 팩 갤릭 단장이 토론토로 오면 급여도 주면서 정식 코치로 대우하겠다고 해서 결국 토론토로 간 겁니다. 그래서 마이너리그 로빙 코치를 하면서 스프링캠프에도 동행하고 루키리그부터 메이저리그까지 그레이드별로 다 돌아봤습니다. 그게 지나서 보니까 참 좋은 경험이 됐어요.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미국 마이너리그를 그레이드별로 다 볼 수 있을까 싶었죠. 되돌아보면 토론토 블루제이스에 정말 고맙습니다. 항공료, 숙식 등 모든 것을 다 지원해줬거든요. 그래서 혼자 미국에서 한 시즌동안 시간을 보내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정립을 잘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이 권력, 돈, 명예가 있는데, 저는 명예를 추구하겠다고 방향으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이후 사실 5번 정도 감독 제의를 받았습니다. 아울러 감독을 하기에는 제 능력도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한 구단의 우승보다는 제가 힘이 닿는 한 한국 야구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더욱 값어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죠. 그래서 해설하면서 야구발전위원장을 겸한 것처럼 다른 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방향이 정해지고 나니 어떤 유혹이 와도 안 넘어갔어요. 정치 쪽에서나 재벌 쪽에서도 좋은 조건에 제의가 왔지만 다 사양했습니다. 그때가 제 인생을 정립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해가 되었는데, 청보 감독을 하다가 그만두지 않았으면 그런 기회가 있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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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선배로서 청년들에게 한마디 해주신다면요.

라떼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요. (웃음) 제가 젊었을 때도 어려움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젊은이들을 보면 너무 힘들어하니까 참 마음이 아파요. 우리 때는 경제가 성장해서 팽창할 때니까 구인난이었습니다. 제가 다리를 다쳐서 고대 법대 대학원에 다닐 때, 6개 그룹에서 다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구직난이니까 다들 너무 힘들어 하잖아요. 환경이 그런 상황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절대 좌절하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남을 따라해서는 안 된다. 남을 따라하지 말고 쉽게 말해서 연봉이 낮거나 대우가 좋지 않더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다가 그 분야에서 숙련이 되거나 인정을 받으면 나중에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현실 속에서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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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의 현재와 미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스포츠산업 모두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KBO리그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KBO리그가 팬데믹에 어떻게 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KBO리그를 포함한 야구계 전체에서 위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제 프로야구의 전성기는 끝났습니다. 지금부터는 어떻게 하면 인기가 급락하지 않느냐 내지는 하향곡선을 덜 그리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팬데믹은 경제 상황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고, 아시다시피 한국 프로구단은 소속 그룹에 영향을 받습니다. 당장 예산을 줄이기 시작할 겁니다. 예를 들어 작년 대비 10% 비용 절감하라고 하면 야구팀도 다 줄여야 합니다. 선수, 코치, 해외 전지훈련 등 모두 줄이기 시작할 것이고, 어떤 구단들은 선수들 식대까지도 줄여야 할 겁니다. 결국은 구단들이 자생력을 키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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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허구연 위원의 최종 꿈은 무엇입니까?

캄보디아나 베트남과 같이 야구 저개발국의 발전을 위한 역할도 계속하고 싶습니다. 이만수 씨가 라오스에서 그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제 미얀마만 남았거든요. 인도차이나반도에 한국 기업을 내세운, 축구의 스즈키컵처럼 (웃음) 그런 것도 해보고 싶고요. 사실 저는 여행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지금까지는 매번 야구가 있는 나라만 다녔습니다. (웃음)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고, 메이저리그 시즌 중에 미국 가서 야구도 보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야구로 평생을 살았기 때문에 은퇴하면 국내에서 어린이 야구나 아까 말했던 제도권 밖의 야구 발전을 위해 시간을 많이 할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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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그아웃 매거진 113호 표지


위 기사는 더그아웃 매거진 2020년 113호(9월 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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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급 닉네임 어쩌고
  • 2014.03.16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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