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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GOUT Interview] SK 와이번스 박정권 코치 MEMORIES

dugout*** (dugout***)
2019.12.05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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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면 기억될 그 이름

 

박정권의 야구인생을 들여다보면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는 듯하다. 운이 좋은 듯 보이지만 일생 자체가 고난과 역경의 여행길이었다. 손바닥이 터져라 피땀 흘려 훈련해 겨우 자리를 잡는가 하면 예상치 못한 부상으로 발목을 잡혔다. 하지만 박정권에게 포기란 없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났고, 찢어지면 다시 꿰맸다. 깨져도 다시 붙여 경기에 나서려고 했던 강한 의지와 노력은 괴물적인 재생력을 높였다. 불사조와 같았던 그 모습을 본 야구팬들은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박정권’이라고 외쳤다. 올 시즌 은퇴 선언 후 코치로 전향한 박정권은 원팀맨으로서 SK 와이번스에 남아 또 다른 시나리오를 쓸 예정이다.

 

Photographer 황미노 Editor 표권향 Location SK퓨처스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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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치로서의 첫발

 

낙엽이 떨어지듯 지난 10월 26일 ‘가을사나이’ 박정권이 은퇴했다. 코치로서의 새 출발을 알린 박정권은 마무리캠프 시작과 동시에 강화에 위치한 SK퓨처스파크로 출근했다. 방망이가 아닌 핸드폰과 수첩을 들고 타석이 아닌 네트 옆에 서 있는 그의 위치가 다소 낯설었다. 아직 ‘코치님’이란 호칭 뒤의 인사가 어색한 듯 머쓱한 표정을 지었지만, 핸드폰 내장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을 보며 선수들과 타격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니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코치가 된 후 첫 인터뷰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강화에서 2군 선수들과 마무리훈련을 하고 있다. 이제 열흘 정도 됐는데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시간이 훅 간 것 같다.

 

코치로서 강화행 첫 출근길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어색하기도 했고… 전학 갔을 때? 새로운 학교에 처음 가는 기분이었다. 음… 정확하게 예로 들어보자면, 남자들은 알겠지만 훈련소에 입소한 첫날의 느낌? (웃음)

 

코치실에 들어갔을 때 제일 반겨준 사람이 누구인가.

아무래도 제춘모 코치가 제일 반겨줬다. 이대수 코치도 있고! (제춘모 코치가 출근 첫날 셀프 카메라를 찍어서 자신의 SNS에 업로드했다.) 일주일 동안 같이 훈련하고 호주로 가버렸는데, “반갑소잉”이라고 광주 사투리를 섞어가며 격하게 반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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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시절 후배들에게도 편한 선배였다. ‘코치’ 박정권을 대면한 선수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선수였을 때 선배와 후배, 형과 동생 사이로 지냈기 때문에 서로 장난을 많이 쳤다. 그래서 그런지 후배 놈들이 먼저 장난을 걸어왔다. 그래도 코치로서 나타나니까 갑자기 거리를 두기 시작한 녀석들도 있었다. 깍듯하게 “코치님~ 코치님 하겠습니다”라며 말이다. 선수들이 제일 반겨줘서 고마웠다.

 

그중에서 어색해하는 선수들도 있었을 것 같다.

은퇴를 결심하고 1군 선수단에 인사하러 갔다. 선수들은 뭐 다 장난꾸러기들이니까 “아이고~ 코치님 오셨습니까”라면서 “코치님 오셨으니 비켜드려라”며 홍해 갈라지듯 슬슬 자리를 터주며 짓궂게 장난을 치더라. 2군 선수들은 반겨줄 줄 알았는데 여기서도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나 보다. (웃음) 예전부터 장난은 치지만 선은 지켜야 되는 선배라는 게 있어서 수위는 지킨다.

 

팬들의 반응은 보았는가. 이제 “정권이 내”란 말을 못 한다며 아쉬워했다.

기사를 잘 안 보는 스타일이라 댓글도 잘 안 본다. 안 보던 놈이 보면 상처받을 수 있고, 내 결정에 어떤 미련이란 걸 남기고 싶지 않아서 특히 댓글은 잘 안 본다.

 

‘정권이 내’라는 유행어를 알고 있는가.

당연히 알고 있다. 재미있었다. 팬들이 나에게 그만큼 기대를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할까 봐 미안한 마음이 컸다. 팬들의 응원에 항상 힘을 얻었고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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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떠날 수 없었던 그라운드

 

1999년 11월 2일, 박정권은 죽을 때까지 이날의 기분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기보다 신나는 댄스음악을 들으며 춤을 췄던 이 날은 그가 프로구단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2000시즌 신인 드래프트에서 높은 순위로 지명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첫 번째 꿈을 이뤘기 때문에 어느 날보다도 기뻤다. 잠시 입단을 미룬 박정권은 동국대에 진학해 기본기를 다지고 졸업 후 SK에 정식 등록됐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가을만 되면 SK팬들이 찾는 ‘베테랑’ 선수가 됐고 ‘가을사나이’라는 호칭도 이름 앞에 붙었다. 그리고 프로 생활 16년 만에 분신과도 같았고 소중했던 유니폼을 벗고 지도자로서 새 길을 닦았다.

 

마흔까지 야구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은퇴를 결정한 이유가 무엇인가.

최근 2년 동안 강화에 있었다. 팀의 방향성에 들어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선수 생활을 더 고집한다는 것은 민폐라고 생각했고 주위에서도 보기에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지인데 조금 자신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이젠 그만할 때가 됐다는 느낌을 올가을에 받았다.

 

한국프로야구 팬들은 가을만 되면 박정권을 떠올린다. 어떤 부분이 자신을 위축되게 했는가.

팀 전략에 맞지 않아서 기회를 많이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나가서 결과를 내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이런 부분에 있어서 타석에 들어갔을 때 조금 부담을 느꼈다.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은퇴 의사를 전했을 텐데.

부모님과 부인에게 내가 이런 생각이란 것을 말했다. 물론 나보다 더 아쉬워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며 방망이를 놓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설득했더니 원하는 대로 하라며 내 의견을 지지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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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코치가 된 절친들의 조언이 컸을 것 같다.

그 친구들의 조언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바로 옆에서 나를 객관적으로 많이 봐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이 결정적이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오래된 사이라고 해도 잘 못 하는 것인데, 오랜 기간을 같이 했기 때문인지 쉽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조언이 필요한 나에게 먼저 시작한 친구나 동생들이 “코치로서 후배들을 돌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바로 옆에 있는 측근들이 조심스럽게 이야기해주니까 결정하기가 쉬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도움이 됐던 말이 무엇인가.

조동화는 친구고 (제)춘모는 동생인데, 워낙 친한 사이다. 이들이 조금 강하게 이야기해줬다. “그만해~”라며! (웃음) 이들과 많이 대화했고 가장 큰 도움을 받았다.

 

코치연수 대신 강화에서 2군 선수들과 머무르는 것을 선택했다.

코치로서 갖춰지지 않은 내가 그곳에 가서 일 년이란 시간 동안 뭘 배워올 수 있을까 진지하게 생각했는데 확신이 안 섰다. 한국에서 코치로서 내 것을 갖춰놓고 가야 습득하는 것도 빠를 것 같다고 생각해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강화에서 많은 생각을 했나 보다.

다른 게 아니라 2년 동안 강화에서 연수했다고 생각한다. 어찌 됐든 이 선수들과 훈련하려면 우선 커뮤니케이션이 잘 맞아떨어져야 친밀감 있는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멀리 갔다가 갑자기 돌아올 텐데 그땐 선수들도 바뀌어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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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하면 누구? 정권이 내!

 

박정권 하면 바로 떠오르는 단어가 ‘가을’이다. 10개 구단 팬들이 인정한 ‘가을사나이’ 박정권은 기가 막히게 가을 냄새를 잘 맡았다. 제3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도 참 재미있는 기록이 있는데, 시즌 초반 부진하다가도 6월, 늦어도 8월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안면몰수하고 불방망이를 휘둘렀다. 데뷔 후 처음으로 규정타석을 채운 2009년에는 팀 내 최다 홈런(25개)을 때려내며 거포 이미지를 구축하더니 플레이오프에서 연속 홈런 등 적시타를 날려 MVP로 선정됐다. 그뿐인가?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해결사로 자리매김하며 최우수선수로서 왕좌에 올랐다. 그의 가을 행진은 기회만 있다면 계속됐고 지난해 포스트시즌과 한국시리즈에서는 결정적인 순간 팀의 승리를 결정짓는 홈런포로 가을야구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Mr. 옥토버’라고 부른다.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활약을 펼쳤다. 이 계절의 기운이 남다른가.

솔직히 나는 전혀 진짜 없다. 포스트시즌에서 최상위권을 휩쓸거나 엄청난 활약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팬들이 이야기하는 임팩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 순간이 기억에 많이 남으니까 내 이름을 불러주고 응원해줬던 것 같다.

 

가을야구라는 단면만 보면 좋지만, 정규시즌 초반 페이스가 다소 늦게 올라왔다.

매년이 고민이었다.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무작정 열심히만 했던 것 같다.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돌아보니 누구보다 열심히 하긴 했는데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는지는 몰랐던 것 같다.

 

대학 시절 미팅은커녕 PC방도 안 가고 혼자 훈련만 했다. 하지만 노력한 만큼 결과를 빨리 얻지 못했다.

그땐 그랬다. 그래도 당시 그렇게 했던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프로까지 와서 기억에 남을 만한 선수로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대학생 때부터 열심히 했던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생각 없이 야구만 했다”고 하더라. 그땐 나름대로 생각 있게 했다고 여겼는데 말 그대로 무식하게 야구만 했던 것 같다.

 

노력에 비해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답답했을 것 같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지나고 보면 후회가 남는다. 선수 생활에 마침표를 찍어서 후회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왜 그땐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남아 아쉽다.

 

그래도 FA를 경험한 선수이지 않은가. 그때 ‘혜자로운 계약’이었다고 팬들이 말했다.

FA가 꿈이었기 때문에 기분이 정말 좋았다. 금액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욕심이 없었다. 이것만 보고 달려왔고 드디어 해냈으니 성취감도 컸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계약 기간 4년이 지나니까 입장이 뒤바뀌어 버렸다는 것이다. 많은 분이 진짜 계약 잘한 선수로 기억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웃음)

 

가장 아쉬웠거나 속상했던 때는 언제인가.

아무래도 큰 부상이 있던 2008년이 가장 아쉽다. 조금씩 시합을 나갈 때쯤 부상으로 인해 시즌 아웃됐다. 기술적인 경험이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실수가 났기 때문에 그해가 제일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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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야구하는 순간들이 행복하다고 말해왔다.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인가.

신인 때다. 프로 유니폼을 처음 입은 날을 잊지 못한다. 그때 그 기운과 그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렇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가을야구는 언제인가.

2010년보다 2009년이 조금 아쉽기도 하고 가장 기억에 남는다. 2009년부터 ‘가을사나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에서도 잘했다. 제일 아쉽기도 하면서 재미있었던 가을이었다.

 

올해 본인에게는 선수로서 마지막 가을야구였기 때문에 기분이 짠했을 것 같다.

10으로 나눈다면 허전함이나 아쉬움은 2 정도 되고 후련한 마음이 8 정도였다. 본인이 부정했을 뿐이지 강화에 있으면서 스스로 마음을 정리했던 것 같다.

 

‘가을 사나이’가 별명인 만큼 앞으로도 가을이 오면 특별한 감정을 느낄 것 같다.

가을은 낙엽? 바바리코트도 있을 것이고 트렌치코트라고 하나? (웃음) 끝까지 같이 갈 동반자인 별명인 것 같다. 내년, 후년 가을야구가 왔을 때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내 이름이 나올 상황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가을야구는 매년 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계속 기억된다면 영광일 것 같다.

 

선수 박정권에게 몇 점을 주겠는가.

80점정도? 80점은 열심히 한 것에 대한 점수이고 마이너스 20점은 열심히만 했던 것 같아 감점을 줬다.


박정권_(5).jpg

 

#선수와 코치의 연결고리

 

최근 강화에서의 2년이란 시간이 박정권의 인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화려한 1군 무대에 익숙해져 데뷔 초 2군에서의 생활을 잠시 잊었던 그에게 초심이라는 첫 마음을 지니게 했다. 동시에 끝맺음과 새로운 시작을 설계할 수 있는 용기를 안겨줬다. 가장 높은 곳에서의 시선을 가장 낮은 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했다. 작은 것을 바꾸니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았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지도자로서 훈련에 임하기 때문에 이전과 다른 각오일 것 같다.

선수 때는 몸을 많이 움직이지만 한 가지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코치는 가만히 서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눈과 머리는 계속 돌아가고 있다. 말로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다. 아직 초보 코치라서 조언할 상황은 아니지만 선수와 같이 영상을 보며 대화로써 보완해야 할 점을 찾아 개선해가는 방향을 잡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영상을 많이 찍고 있다.

 

어떤 지도자가 되고 싶은가.

항상 선수와 같이 있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2년 동안 강화에서 느꼈던 것은 1군과 다르게 2군에 있는 선수들이 움츠려있고 소심하다는 것이다. 마음의 상처가 있는 선수들도 매우 많다. 그래서 타격 코치보다는 전문적이지는 않지만 심리상담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싶다. 그래서 책이나 자료를 볼 때 타격 외에도 심리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방법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인사 부탁한다.

안녕하십니까, SK 와이번스 팬 여러분! 이제 지도자로서 첫발을 내디딘 ‘초보 코치’ 박정권입니다. 16년 동안 선수 생활하면서 여러분의 응원이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그동안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도자로서 첫발을 내디뎠으니 지도자로서 SK 선수들을 위해, 좋은 선수들이 나올 수 있도록 뒤에서 열심히 서포트하는 좋은 지도자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도자 박정권으로서도 많은 응원과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

미뇽 머클로플린은 ‘단 하나의 중요한 용기는 당신을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나아가게 하는 용기다’고 말했다. 평생 모든 것을 바쳤던 일을 끊어버리기란 살점이 뜯기는 고통보다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 인지하고 중요한 시점에 놓인 동료들을 위해 내려놓는 모습에서 존경의 박수와 다음 페이지의 첫 장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뜨거운 가을을 선사했던 박정권의 아름다운 마침표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화살표를 야구팬들은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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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16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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